/은재박사

"그렇다곤 해도… 상당히 투박한 방법을 썼네."

툭, 하얀 룩이 검은 나이트를 잡는다. 실버애쉬는 박사의 나이트를 판에서 치운다.

"너나 네 친구나. 자객에 독이라니, 쉐라그에선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면 안 되는 거야?"

박사는 퀸을 대각으로 옮기고, 실버애쉬는 폰을 전진시킨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기에는 극단적인 쇼가 필요했지. 그 정도가 아니면 군사를 끌어들일 명분은 못 되었을 거다."

비숍이 옮겨진다. 킹이 전진하고, 폰이 폰을 잡는다. 잠시 두 사람은 말없이 게임을 이어간다. 검은 룩이 하얀 폰을 잡고, 결국 실버애쉬는 눈을 가늘게 뜨며 폰을 한 칸 전진시킨 후 입을 연다.

"내가 졌군. 그래서… 나와 노시스가 선택한 방식을 힐난이라도 하려는 건가, 맹우여."
"설마. 네 최선에 대해 평가를 할지언정 매도할 생각은 없어. 하필 그런 방법을 쓴 데에도 다 이유가 있잖아?"

하지만 내가 그 일로 보고서를 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네가 알 필요가 있어. 한숨 섞인 목소리로 한탄하는 박사를 보며 실버애쉬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에게 비난받고, 매도당하는 것은 그리 신경쓰지 않는다. 그 비난에는 어떤 가치도 없기 때문에. 하지만 눈 앞에 있는 상대가 내리는 평가는 그가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충고이자 조언이었다.

물론 실버애쉬는 그 일에 대해 자신의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시간만 충분했더라면, 박사의 말대로 온건한 방법을 써서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늘 그 부분이 문제였다. 쉐라그─ 히라에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 침략당하기 시작한 후에는 이미 늦는다는 것. 그래서 엔야 역시 쉐라그의 문을 외부에 여는 것에 동의했을 것이다. 직접 가르친 적은 없지만 충분히 영리한 동생이니까. 그 점에서 엔시아를 엔야에게 보낸 박사의 판단은 적확했다. 이미 골이 깊어져 여동생의 심중을 헤아릴 수 없는 자신에게는, 엔시아를 통해 엔야의 결심이 서도록 등을 떠미는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쉐라그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외부에 대한 거부감과 흘릴 피를 최소화하며 개방된 것은 결국 박사가 개입한 덕이다. 실버애쉬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럴 의도로 부른 것은 아니었지만 박사는 시기적절하게 판을 짜 내전의 여지를 없앴다. 그 점에 대해서는, 실버애쉬에게 있어 아주 드문 일이지만, 감사를 표해야 할 정도다. 실버애쉬는 자신이 미처 생각해내지 못한, 그리고 실행할 수도 없을 방법이 그곳에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아한 방식으로 자신을 '가르친' 박사라는 인물에 대한 흥미는 엔시오데스 실버애쉬를 로도스 아일랜드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것은 후회하지 않을 결정이 되었다. 쉐라그에서의 체스 대결에서 두 사람은 무승부를 맞이했다. 당시에는 운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던가.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그를 다시 마주한 실버애쉬는, 박사에게도 무승부가 드문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어떤 면에서 무척 닮아 있었다.

실버애쉬는 여전히 체스판을 내려다보며 집중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 박사의 눈 앞에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또다시 긴 한숨을 내쉰다. 얇은 손가락이 체스 말들을 하나씩 치우기 시작했다.

"너… 깜짝 놀랐잖아."
"그대가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아 도움을 좀 줬지."
"갈수록 내 앞에서 이미지 관리를 안 하는 것 같다?"

실버애쉬 역시 그를 도와 체스판 위를 깔끔히 정리했다. 판을 치우고, 두 사람은 창 너머로 보이는 경치─현재 로도스 아일랜드 본함은 카시미어의 그랜드 나이트 영지에 정박해 있었기에, 화려한 네온사인이 바깥을 온통 메웠다─를 바라본다. 소음은 완벽히 차단되어 있으나 그 아래 분주한 사람들에게서 활기를 앗아간 건 아니다. 박사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물끄러미 관찰하고 있다. 실버애쉬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 대신 묻는 것을 택했다.

"뭘 보고 있지?"
"저기, 사람들 말이야. 손에 들린 건 다음 기사 스포츠 경기의 티켓이네. 구하기 어려운 걸텐데 걸친 옷은 평범한 노동자의 것이고. 보나마나 하루이틀치 급여를 탈탈 털었겠지. 저 경기에 그런 가치가 있을까, 싶어서."

턱을 괸 채 가정을 줄줄 늘어놓는 박사의 모습은 평소와 그다지 다를 바 없는데,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이는 얼굴에는 어쩐지 피로감 같은 것이 묻어나온다. 그러고 보면 이곳에 온 것도 어느 정도 '빛의 기사' 니어와 관련되어 있었던가. 실버애쉬의 생각 틈으로 잠시 데겐블레허가 스친다. 그와는 이미 상관 없는 도시가 되었건만.

"나의 맹우가 오늘은 유독 피곤해 보이는군. 무슨 일이 있었던가."
"아, 티가 나? 사실 니어가 바라는 걸 좀 도와주려고 하는데~ 그 상업연합회를 상대하려니까 얼굴 근육이 피곤한 거 있지. 하루종일 웃는 것도 쉽지 않더라니까. 다행히 커넥션을 만들어줄 현지 가이드가 있어서 그쪽 수고는 덜었어."
"사업가로서의 면모도 있었나? 과연 그대는 예상할 수 없는 일만 벌이는 것 같군. 필요하다면 도움을 청해도 좋아."
"카란 무역회사의 사장을 대동하라고? 그 미꾸라지들 성격에 경계부터 할 걸. 됐어."

한 손을 내저은 박사가 쓰고 있던 후드를 벗고 안락의자에 편히 기댄다. 네온사인의 불빛이 유리를 투과해 얼굴 위로 춤추듯 깜빡거린다. 눈부신 거리는 불야성이라, 한밤중임에도 시간이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우스갯소리를 하던 박사는 다시금 조용해진 채 바깥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본다. 확실히 지치긴 한 모양이었다. 그는 평소에 실버애쉬 앞에서 저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두 사람은 협력 관계에 있지만 언제든 이유만 생기면 갈라설 수 있는 비즈니스 동맹이다. 실버애쉬 자신도 내심 그것을 기대하고 있지 않았던가. 두 번은 보기 힘들 호적수와 전력으로 겨뤄볼 수 있다면, 승패가 불확실한 게임일지언정 기꺼이 몸을 던지리라.

하지만 그것이 오늘은 아니었고 실버애쉬는 또한 박사의 맹우이자 친구이기도 했다. 자청한 이상 변덕을 부릴 생각은 없다. 실버애쉬는 몸을 일으켰다.

"방까지 돌아갈 힘도 없나? 곧 잠들 것 같은 얼굴인데."
"실버애쉬는 날 참 잘 읽는다니까…."
"데려다주지. 자, 팔을 감아라.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박사의 앞에 상체를 숙여, 체격에 비해 종잇장처럼 가벼운 몸을 안아든 실버애쉬는 박사가 자신의 목에 팔을 두른 것을 확인한 후 걸음을 옮긴다. 묵직한 구두 소리가 사람 없는 복도에 울린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누군가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면, 그리고 박사가 그걸 안다면 보나마나 내려달라고 했을 테다. 자신의 앞에서는 졸음도 감출 생각이 없으면서 일개 오퍼레이터들 앞에서는 그리 신경을 쓰다니 순위가 잘못되지 않았나 싶다.

"아우… 진짜 잘 것 같아."
"조금만 참아라. 로도스 아일랜드의 생체 인식 시스템이 잠든 사람에게까지 적용되는지는 아직 모르겠거든."
"이참에 시도해보지 그래……."
"그대는 피곤하면 아무 말이나 뱉기 시작하는군. 잘 알았다. 주의하지."

품 안에서 의미모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실버애쉬는 내심 웃음을 참으며 박사의 방 앞에 도착해, 박사가 인식 시스템에 손을 얹을 수 있도록 품에서 내려주었다.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작게 하품한 박사가 돌아서서 실버애쉬를 향해 고개를 숙이라는 듯 손짓한다. 박사와 거의 머리 하나쯤이 차이나는 필라인은 이런 상황이 처음은 아닌 듯 익숙하게 눈높이를 맞춘다.

박사는 그의 머리 위에 솟은 귀로부터, 뺨을 덮은 머리카락을 지나, 매끄러운 턱선을 양 손바닥 사이에 담고 나서 실버애쉬의 콧등에 짧게 입술을 눌렀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이제 좀 자야겠다…. 내일 봐."

문이 닫힌 뒤 실버애쉬는 자신의 방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려 걸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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