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몽

夢; 꿈을 깸

 

 이네스가 로도스 아일랜드에 전략적 협력을 위해 찾아왔을 때, 박사는 상대에게서 그림자가 드리우듯 살며시 차오른 경계와 적대감이 방호복을 뚫고 피부 표면을 건드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불신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박사는 개의치 않는 태도로 그녀를 맞이했다. 아스카론이 박사에게 한 당부의 영향도 있겠으나("그녀의 신뢰를 확실히 얻길 바란다.") 무엇보다 박사 자신이, 스스로의 기억에 거대한 공동이 생긴 이상 타인의 이해할 수 없는 반응도 어느 정도 수용해야 한다는 걸 이미 납득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머리로 한 이해가 아니라 그간 많은 반응들─켈시, 아미야, 그리고 여러 정예 오퍼레이터─로 인한 체득에 가까웠다. 그리고 런디니움에서 이네스가 보여준 '인내심'에 대한 성의 표시이기도 했다.

 

 기억을 잃은 후 매 순간 박사는 무엇을 감춰야 하는지, 또 드러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한동안 주변에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었다. 그에 따르는 평가는 크게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과거의 박사보다 현재의 박사가 낫다는 것. 다른 하나는 현재의 모습을 믿을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어느 쪽이건 박사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에 오래 의문을 갖지는 않았다. 박사는 그들이 보기에도 지금 자신의 모습이 예전과 확연히 다르기는 한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이네스는 후자에 해당했다. 많은 불신감 사이에서도 그녀의 것은 아주 옅고 치밀하고 확고해서, 결코 흐려지지 않을 것 같았다. 박사는 내심 '확실한 신뢰'보다는 '확실한 기브 앤 테이크'가 더 현실감이 있을 거라고 자조했다.

 

 모두가, 그러니까 이 모두라 함은 박사를 포함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라면 그건 박사가 함선으로 찾아온 어떤 방문객에게 완전히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다. 방문객의 이름은 총웨. 쉐이 파편의 맏이이며, 로도스 아일랜드에 거처를 얻어 머무르고 있는 니엔과 시, 링의 오라비이기도 했다. 리 탐정사무소의 리와 와이후와는 이미 구면이라고 했던가. 수많은 위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만, 이 모든 부연을 떠나도 총웨는 그 자체로 존재감이 돋보였다. 누군가 그를 처음 마주했을 때의 박사를 자세히 보았더라면, 눈이 먼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노라고 회고했을지도 모른다.

 

 박사가 정확히 언제부터 그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어느 정도 기억을 잃은 자신에게 적응한 박사는 감정을 숨기는 데에 꽤 능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총웨가 로도스 아일랜드에 머무르기로 한 후 날이 지날수록 그 사실을 눈치채는 사람은 조금씩 늘어났다. 로도스 아일랜드의 책임자로서 총웨가 관련되어 있는 문제에 판단이 흐려지거나 결정을 하지 못하는 일은 없었으나, 박사는 임무 인원 편성을 할 때 고민하는 시간이 늘었다. 시간이 비면 피곤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그가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보고는 했다. 혹자는 박사가 갑판에서 멍하니 비를 맞고 서있다가 거의 한 시간이 다 되어서야 함내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또 누군가는 푹 젖은 채 총웨의 방이 있는 방향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 적도 있었다.

 그게 사실인지, 정말로 그를 찾아간 건지는 모르지만……. 아무쪼록 로도스 아일랜드의 일원들이 마주한 여러 정황은 박사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폭로했다.

 

 이네스는, '그' 박사가 그런 지극히 인간적인 이유로 방황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정확히는 믿고 싶지 않았다, 에 가까웠다. 바벨의 전쟁 기계, 자신 외의 타인을 전부 판 위에 올라간 체스말로 보던 사람. 그 W조차 과거의 박사와 처음 시선을 마주쳤을 때 공포에 가까운 불쾌감을 느꼈다. 그런 사람이 지극히 평범한 감정에 휘둘려 고민하고 방황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래서 소문을 접한 후 처음 마주한 박사가 서류를 한 뭉치 품에 안은 채 함선 휴게실 구석에서 졸고 있는 모습이었을 때는 맥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저게 정말로 자신이 알던 바벨의 박사인가. 저 사람이?

 

 적당히 밝기를 조절한 휴게실 조명 아래 일감과 함께 지친 얼굴로 잠든 박사의 모습은 이곳에서 그리 드문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오퍼레이터들은 말소리를 낮추고 조용히 그를 지나쳐갔다. 개중에는 옷을 정리해주거나 담요를 덮어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사는 정말로 지쳐 보였다. 눈 밑은 거뭇하게 그림자가 졌고 한쪽 팔이 아슬아슬하게 팔걸이에서 떨어질 것처럼 걸쳐있다. 그런데도 불편한 기색 하나 없이 곤히 자고 있어서, 다른 편에 앉아 얘기를 나누던 오퍼레이터가 이따금 흘끔거렸다.

 결국 이네스는 걸음을 옮겨 그에게 다가간다. 박사의 팔을 살짝 들어 그의 무릎에 얹어놓고 기울어진 종이뭉치를 옆 테이블로 옮겨주었다. 뒷걸음질로 떨어지면서 이네스는 이 일련의 행동을 핑계삼아 잠시 그를 엿보았다. 내심 그곳에 자신이 기억하던 전쟁의 그림자가 비치지는 않을지 의심하면서.

 

 이네스의 아츠에 감싸인 박사의 그림자는 모닥불 불빛처럼 부드럽게 흔들거렸다. 그곳에는 다정한 슬픔과 체념이 있을지언정 전쟁의 화마와 살육, 공포의 꼬리를 무는 증오는 없었다. 그는 무거운 짐을 품에 안은 채 어디로 갈지 고민하고 있었다. 갈무리하지 못한 감정이 불티처럼 툭툭 튀었다. 불안과 혼란이 마음을 짓눌렀지만 그뿐. 그의 꿈은 평화로웠다. 그리고 평화를 갈망했다.

 그녀는 스스로가 틀렸음을 인정해야 했다……. 지금의 박사에게는 전쟁을 위한 전쟁을 하던 그 당시의 어둠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휴게실의 문으로 걸음을 돌렸다.

 

 휴게실을 나온 이네스는 곧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벽에 기대 선 외드레르를 마주했다.

 

"뭐야. 계속 여기 있었어?"

"네가 경계하던 것에 대한 답을 얻었나 해서."

"심지어 보고 있었다는 거네. 네 그런 점이 기분 나쁘다는 생각을 좀 했으면 좋겠는데?"

"유의해 두지. 그래서 결론은 어땠나?"

"……."

 

 이네스의 못마땅한 표정과 침묵은 몇 마디 말보다 확실하게 의도를 전달했다. 외드레르는 덤덤한 투로 그런가, 하고 말았을 뿐이다. 잠든 사람과 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지금의 박사는─작전에 임하지 않았을 때, 사적인 영역에 한해서지만─오히려 겁이 날 정도로… 인간 같았다.

 

"우리에게는 호재라고 봐야겠지. 적어도 목표를 이룰 때까지 이곳에 의탁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그 사람은 예전에도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능숙하게 숨기고 우릴 이용했어."

"경계할 필요는 있어, 하지만… 나는 네 능력을 믿는다. 박사가 무의식까지 통제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산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지 않나."

 

 이제 한 쪽만 남은 외드레르의 시선이 잠시 박사가 있을 휴게실 문 쪽을 향했다.

 

"어쨌든 우린 '전략적 협력'을 위해 로도스 아일랜드와 계약한 용병일 뿐이야. 머물 곳은 조건을 따져 정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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